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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인생의 카운트다운 시39:4-7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020-08-27 15:55
조회
756
계절이 바뀔 때마다 우리는 인생을 관조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해서 진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자연은 있다가 없어지는 추상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은 실상입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우리 인생이 저렇게 떨어질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기우는 석양을 보며 우리 인생도 저렇게 저물 때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찌 보면 덧없기 그지없는 인생이 왜 이렇게 덧없을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가을을 생각하고 열매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다윗은 두 가지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첫째 기도는 4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두 번째 기도는 7절입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 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다윗이 드린 기도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는 사뭇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강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건강을 요구하고, 물질의 풍성함을 기도하고, 지혜의 충만함을 간구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거꾸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다윗의 기도가 잘못된 듯 보이지만 다윗은 믿음의 거장입니다. 다윗이 바로 본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연약함을 알 때보다 강한 때가 없습니다. 강하다고 생각할 때보다 사실은 또 약한 때도 없습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착각하면 자기도 남도 망하게 합니다. 우리는 사실 한없이 연약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지극히 겸손한 자가 되어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힘을 얻고 세상을 이기는 길이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인생의 연약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1. 다윗은 자기 인생이 짧다는 데서 연약함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인생은 길고 긴 것 같으나 지극히 짧은 세월입니다. 5절 마씀에 다윗은 자기의 날이 손 넓이만 해서 없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인생의 연수는 70-80년입니다. 앞에서 보면 길게 보이지만 지나놓고 보면 지극히 짧은 세월입니다.

한 해의 첫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러가 버린 것입니다. 물 흐르듯 바람 불듯 흘러가 버린 시간들입니다. 이토록 짧게 지나가 버리는 세월을 위인들이 어떻게 정의했습니까?.

빌리 그래함 목사는 인생의 시간들을 이렇게 분류했습니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 부모 밑에 있는 시간이 15년, 20년은 잠으로 소일하고, 5년은 늙어 무능하여 일 못하고, 15년은 먹고 쉬고 즐기고 겨우 15년만 사람 구실을 할 뿐이다.”

솔직히 인생은 뜨는지 모르게 져버리는 태양입니다. 내 인생이 지극히 짧다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지식도, 명예도, 권세도 인생의 무상함을 막지는 못합니다.

인생의 덧없음을 깨달을 때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로 나눠집니다. 첫째는 늙기 전에 먹고 즐기자 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하루살이 같은 인생입니다.

둘째는 겸손함으로 어떻게 살까를 결정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살아야 합니다. 알렉산더처럼 세계를 정복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은 겸손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다윗은 육체의 죽음을 통하여 연약함을 배웠습니다.

죽음은 인생의 풀지 못한 최대의 수수께끼입니다. 죽음을 이긴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은 역사가 없습니다. 수천 년 전과 지금과 동일합니다. 역사는 흐르는 것이고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변화가 없습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사람들은 동일하게 죽음으로 자기의 생명을 마감합니다. 거지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습니다. 어떤 사람도 자기를 찾아온 죽음 앞에 무력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연약함을 깨닫고 겸손해야 합니다.

모세는 죽음에 대하여 시편에 기록하기를 “주께서 저희가 홍수처럼 쓸어가나이다 저희는 잠깐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시 90:5)”라고 했습니다. 이 죽음의 위력 앞에서 내게도 반드시 죽음은 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연약함을 배울 때 우리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전7:2)” 초상집에서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떠나겠지” 하는 인생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매일 집을 떠나면서, 차를 타면서, 오늘도 무사히 지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누는 인사가 안녕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올 때 준비된 사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하소서”이 기도를 거기에 더해야 합니다. 무사하기만 바라지 말고 언제까지 피할 수만 없는 죽음이라면 준비해서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언제 부르실지 모릅니다. 내 죽음을 내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야 합니다. 오늘도 무사하기만 바랄 것이 아니라 부르실 때 “준비된 사람으로 맞이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건강하다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일지라도 죽음을 소유한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십시다.

3. 인생의 카운트다운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연약함을 배울 때 강해지며 보람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죽음과 덧없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죄 문제를 해결해 놓고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부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영의 죽음. 육신의 죽음. 영원한 죽음이 순서적으로 옵니다. 누구도 이 죽음을 비켜 갈 수가 없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지금 아무리 푸르러도 반드시 메마른 때가 오는 것입니다. 농부가 불태우는 날이 옵니다. 하나님이 육신적인 죽음 뒤에 심판을 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날에 누구를 부르시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스데반은 주 예수를 불렀습니다. 전도자 무대는 “아, 아름답구나 어린 아이들이 뛰논다. 정말 저것이 천국이구나. 죽음이 이런 것이라면 두려울 것이 없어 나는 간다”고 하며 천국으로 갔습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하늘나라에서 전보가 왔어. 빨리 오래. 나 간다. 우리 아름다운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죽으면서 조세핀을 불렀습니다. 조세핀은 나폴레옹을 사랑하는 척하며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철학자 볼테르는 불가지론자입니다. 하나님, 천국, 지옥 등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는 순간에 ‘나는 이제 지옥으로 간다’ 고 소리치고 죽었습니다.

범죄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너는 흙이므로 흙으로 돌아가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죄인을 죽음에서 건지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구원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믿을 때 죽음의 문제는 해결되고 인간은 비로소 구원 얻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생의 허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시간과 영원히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된 그리스도인은 인생이 짧은 줄 알고 순간순간을 보람 있게 살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허무와 고통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나를 맞을 하나님 나라의 준비를 지금 해야 합니다. 그러면 잠을 자다가 죽어도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향락하던 인생을 새 삶이 되게 하고 의미 있게 살게 합니다. 그 분 안에서만 죽음의 공포가 해결됩니다. 인생의 허무가 사라집니다.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세상에서 제멋대로 살던 사람도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그의 인생이 반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잘못을 회개하고 남은 인생을 순간순간 주님의 뜻에 맡기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출생의 순간부터 하나, 둘, 분초를 헤아리는 생명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단지 무사하게 하루를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떼쓰지 마십시오. 하루 이틀, 한 해 두 해 더 사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인생은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 안에서 죽음을 준비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므로 가슴 벅찬 천국의 기쁨을 이 땅과 하늘나라에서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