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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자유와 종노릇 갈5:13-15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020-08-27 15:47
조회
365
우리가 살아가면서 원치 않게 정신적인 고통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한 개인에 의해 주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떤 단체나 사회 심지어 국가로부터 주어지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가 나를 부당하게 통제한다고 판단될 때 자존 감이 상처 나고 이로 인해 큰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느끼는 이러한 정신적인 고통들 중에 자유가 박탈당할 때 느끼는 고통이 있습니다. 아무리 기본적인 욕구가 보장되었을 지라도 자유가 통제되면 그 자체로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대표적인 신분이 노예요 그리고 장소는 감옥입니다.

오늘날에는 신분상의 종은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본문이 기록될 당시에는 종이 존재하던 시대였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종의 신분으로 출생했거나 생활능력이 전무하거나 아니면 전쟁의 포로로 종이 된 경우들입니다.

따라서 종의 삶은 전적으로 주인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심지어 주인은 종의 목숨과 그 자녀의 생명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종은 사고 파는 물건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사람의 자유를 묶어 놓는 것 중에 종의 신분 외에 또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은 수많은 규제와 법칙들이 포함된 율법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해서 철저하게 지키도록 정해진 틀 속에 가두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역기능입니다.

나면서부터 치러야 했던 할례의식이나 어떤 날을 중요한 날로 정하여 지키는 일, 그리고 어떤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 아닌지 구분하는 일입니다. 또한 안식일에는 차도 안타고 머리 손질도 안하고 상거래 중지는 물론 취미활동과 외출도 없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규칙의 지배를 받으며 종처럼 살았습니다. 신분상으로는 자유인이었을지 몰라도 실제 삶은 이 틀에 갇혀서 종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이러한 규칙덩어리 전체를 통틀어 5장3절은 율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의 옭아맴이 얼마나 철저하고도 심각했던지 파울은 이러한 옭아맴을 가리켜 종의 멍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종의 멍에란 주인이 종의 등에다 A자형 나무 가래를 설치해서 그 위에 무거운 짐을 싫고 주인이 원하는 대로 끌고 다닌다는 뜻입니다.


5장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하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실제 자유를 말합니다. 평생동안 그들의 두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돌덩어리 같은 종의 명애와 짐을 예수께서 내려놓아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의 선언이 바로 5장1절입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말 그대로 자유의 선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유가 선포되다보니 또 다른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것은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자유를 누리는 문제입니다.

오랜 동안 억압당했던 사람에게 자유가 주어지면 극단적인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자유를 마음대로 사용해서 악을 행하거나 아니면 익숙하고 편해서 자유를 포기하고 계속 종으로 살기를 고집하는 경우입니다.

초대 교회 안에 율법으로부터 자유가 선포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두 가지 현상이 함께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 현상은 여전히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인 기독교인입니다.

그들은 할례 받을 것을 주장했고 각종 율법의 짐들을 지기를 고집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까지 율법의 틀 속에 살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책망하는 내용이 2절부터12까지입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가 선포되자 나타난 또 한가지 현상은 자유가 마치 모든 것을 다 해도 되는 것처럼 자기 마음이 가는 대로 활동해도 된다는 자들입니다. 자유가 주어졌으니 더 이상 도덕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도덕률 폐기론 자들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13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육체적 방종의 기회로 삼지 말라, 권한에 책임이 따르듯이 자유에도 책임을 있음을 암시합니다.

“오직 사랑으로 종노릇하라” 이 말은 마치 평생을 종으로 살다가 가까스로 자유를 얻었는데 다시 종노릇 하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주인의 신분이시지만 사랑으로 종처럼 종노릇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고난의 잔을 마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주님을 본받아 종노릇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할 수많은 규례들이 적혀 있습니다. 이 모든 가르침들이 추구하고 있는 한가지 정신은 바로 사랑입니다.

“14절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이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는 그 순간부터 그들에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중요한 법 정신은 우리 주님에 의해 다시 한번 강조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시는 그 순간에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나이다” 라고 기도하심으로써 실제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가장 높으신 자유인이셨지만 끝까지 종노릇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종노릇 뒤에 숨겨져 있는 정신이 바로 사랑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랑으로 서로 섬기지 않을 것에 대하여 15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이 말씀은 사람의 야수성을 꼬집어서 사람을 야수에 비유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섬기지 않는 상태로 적당히 평화를 유지하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본성 안에는 죄의 야수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더욱 열심히 서로 섬기라는 사실입니다.

진정으로 자유롭고 싶다면 그렇다면 옆 사람을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그 만큼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겸손과 사랑으로 이웃을 잘 섬기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